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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교가 처음 우리나라에 등장하게 된 것은 고려시대 안향 선생이 중국 원나라에 가서 공자님의 초상과 문하제자, 송나라 성리학자들의 초상 및 위패 등을 가져와 우리나라에서 제사를 드린것이 그 시작이 됩니다. 하지만 그 당시는 교육의 기능은 없이 단지 제사의 기능만 했기 때문에 현대적인 뜻의 향교라 할 수는 없습니다. 초기 향교는 고려 말 포은 정몽주 선생이 시중(지금의 국무총리)이 되어 유학을 부흥시키고자 전국에 향교를 세우도록 했을 때에 나타나지만 지금 모습의 향교는 조선건국(1392년) 이후 숭유억불 정책의 일환으로 어명에 의해 전국적으로 세워지게 되었을 때부터 나타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현재 전국적으로 (남한기준) 234개의 향교가 있습니다.
광주 향교는 조선 태조 7년(1398년) 유학을 온 백성에게 가르쳐 교화(가르치어 착하게 만듦)를 시키기위해 세워졌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서석산(무등산) 장원봉 아래에 있었으나 호랑이가 자주 나타나는 바람에 공부를 하기가 힘들어 성의 동문(지금의 대인동)으로 옮겼습니다. 하지만 이곳은 좁고, 건물도 오래되고, 땅이 낮아 여러가지 불편과 홍수의 피해를 많이 입어서 현재의 위치로 옮겨 진 후 (1488년 권수평현감) 지금의 광주 향교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광주광역시 남구 구동 22-3번지)

지금의 자리에 향교를 세울 때 권수평 현감이 자신의 사재를 털어서 땅과 책과 건축자재 등을 사서 향교를 짓는 것을 보고 백성들이 감동하여 너도나도 향교 짓는 일에 함께하여 몇 달 만에 지어질 수 있었다고 합니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원균 장군이 칠천량 해전에서 패하고 이순신 장군이 백의종군하던 때 일본군이 광주에 쳐들어와 향교의 모든 건물들을 불 지른 후 1600년 유림 및 백성들이 다시 지었습니다. 그 후 1841년 화재로 인해 명륜당과 동, 서재가 불탔고 조철명 목사가 다시 한번 지었습니다. 그 후로 여러번의 수리와 재건축을 한 후 지금의 모습이 되었습니다.
조선시대 3대 국가정책인 숭유억불(유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억압한다. 고려시대 불교의 폐단이 많았기때문), 사대교린(큰 나라를 섬기고 서로 교류하며 친하게 지낸다), 농본정책(농사를 국가 기간산업을 육성한다)의 첫 번째인 숭유억불 정책의 일환으로 조선 태조(이성계)의 어명에 의해 1읍 1교(한 읍에 하나의 향교) 원칙으로 전국으로 향교가 세워졌습니다.

하지만 각각의 지역마다 사정이 있었던 관계로 전국적으로 세워지지는 못했고 태종(이방원) 때 향교마다 학전(국가에서 내리는 땅)과 노비, 운영자금, 서적 등을 하사하는 당근과 향교가 발전하고 쇠퇴하는 것으로 지방관(시장, 군수, 도지사 등)의 인사고과를 매기는 채찍의 정책으로 전국적으로 향교가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조선초기에는 지방문화의 중심지로서 백성의 교육과 향약을 통한 지방문화센터의 기능 및 제향의 공간으로 향교가 잘 운영이 되어 지역발전에 큰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원래 향교의 목적이 조금씩 변하게 되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이유로 ① 적은 보수로 인한 교수진 확보의 어려웠으며 ② 교수진 확보가 어려움으로 인해 30개월의 임기가 잘 지켜지지 않았으며 ③ 과거 급제자들이 지방에서 근무하는 것을 기피하며(교수진은 중앙관리나 과거 합격자) ④ 궁여지책으로 국가에 죄를 지은 양반을 향교의 교수로 발령을 내렸으며 ⑤ 향교의 원 목적이었던 백성교화를 위한 교육보다도 과거시험을 위한 입시학원화로 변질하는 등으로 인해 교육의 질이 떨어짐으로 인해 양반의 자제들이 향교에서 공부하는 것을 꺼리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16세기 서원이 "참교육"의 가치를 내걸고 세워지게 되어 점차 영향력을 확장함으로 인해 향교는 점차적으로 교육기능을 상실하게 되고 서원에 교육기능을 넘겨주었으나 제사의 기능과 향약의 중심지, 지방문화센터 기능으로 인해 현재까지 생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향약]
지방의 자치규약으로서 백성들로 하여금 이웃 간에 서로 돕고 살도록 하였습니다. 향교는 향약의 본부인 향청, 유향소 역할을 담당하였으므로 향약은 향교를 중심으로 해서 발전해 나갔다고 할 수 있습니다.
4가지 규약은 덕업상권(좋은 일은 서로 권한다), 과실상규(나쁜 일은 서로 규제하여 못하게 한다), 예속상교(좋은풍습은 서로 교류한다), 환난상휼(슬픈 일은 서로 나누어 덜어준다)로 구성되며 유명한 향약으로는 이퇴계 선생의 해주향약이 있습니다.
향교는 천민(노비, 첩의 자식, 상공업자, 상인)을 제외한 농민이나 양반자제 모두가 입학이 가능했습니다. 학생은 교생이라고 불리었으며 원칙적으로 기숙사에서 숙식을 하며 엄격한 학칙을 통해 학업에 매진하였습니다. 교생은 군역(16살부터 60살까지 평민 남자는 군대에 갔습니다.)이 면제되고 과거 1차 시험을 합격할 경우 성균관(유일한 국립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런 특권을 악용하여 액외생(기부금 입학생)이 부쩍 늘어나고 돈을 주고 학생의 신분을 사서 군역을 면제받는 일(원납전 구입), 유급(유급을 여러 번 당하면 퇴학조치)을 당하지 않기 위해 시험관을 매수하여 시험을 면제(면강첩 구입) 등을 하는 등 폐단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조선 중기이후 임진왜란, 정유재란, 병자호란 등의 전란으로 인해 국가의 재정이 고갈되어 향교에 국고지원을 할 수 없었으므로 이렇게 해서 모음 자금으로 장학금 지금, 과거 응시생을 위한 노자지급, 학생 및 노비의 숙식자금, 교직원 및 교수의 급료지급, 서적 및 기타 물품구입, 제사, 그리고 향교의 수리 및 보수, 봄, 가을 석전대제에 드는 막대한 비용 충당 등 향교의 발전을 위한 사업에 사용하였습니다.
향교는 교육을 위한 관학(국가에서 세운 학교)이기 때문에 교육을 하기 위해 국가에서 교수진이 파견되었습니다. 이 교수진은 교관이라고 불리는데 교관은 향교에서 학생들을 교육시켰던 선생님들을 말합니다. 이들은 교수, 훈도, 교도, 학장 등으로 불렀으며 이 중 교수, 훈도, 교도는 국가에서 지방으로 파견한 정식 교관이었고 학장은 지방의 관리가 임명하는 직책이었습니다.

조선 태종 때부터 큰 도시에는 국가에서 교수진을 파견했고 조그만 마을에는 각 도의 관찰사(도지사)가 학장을 임명하여 교육을 시키도록 했습니다.

과거에 합격한 사람 중 종 6품 이상의 교관은 교수, 정 9품의 교관은 훈도라고 불렀으며, 생원이나 진사(과거 3차 시험 중 1차 시험 합격자) 출신의 교관은 교도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향교의 운영을 담당하는 분을 학장, 혹은 교임이라고 해서 운영을 담당하게 했습니다.
향교는 기본적으로 제사를 드리는 공간인 대성전과 동 · 서무, 교육을 위한 공간인 명륜당과 동 · 서재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이 두 공간의 사이에는 내삼문이라는 출입문이 있으며 벽으로 공간을 구분하였습니다.

대성전과 명륜당의 배치 위치에 따라 여러가지 형태로 불리는데 가장 일반적인, 즉 가장 많은 향교가 갖고 있는 형대(광주향교도 이 형태를 따름)는 명륜당과 동 · 서재가 출입구 뒤에 있고 그 뒤로 내삼문, 내삼문을 지나 대성전과 동 · 서무가 있는 것을 전학후묘(학교가 앞에 사당이 뒤에)의 형태라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향교에 경사가 있는 지형일 경우 이 형태를 띠게 됩니다.

반대로 성균관이나 나주향교(영광향교, 함평향교) 같이 향교가 평지에 위치해 있는 경우 외삼문 뒤에 대성전과 동 · 서무, 그리고 내삼문을 지나 명륜당과 동 · 서재가 있는 형태를 전묘후학(사당이 앞에 학교가 뒤에)이라고 부릅니다.

특이한 경우 급경사 지형이거나 좌우로 넒게 퍼진 지형일 경우 좌묘우학(사당이 왼쪽 학교가 오른쪽)이나 우묘좌학(사당이 오른쪽, 학교가 왼쪽)의 형태를 띠고 있는 경우도 있는데 좌묘우학의 대표적인 향교는 밀양향교, 광양향교, 영암향교이며 우묘좌학은 돌산향교, 제주향교, 정의향교가 있습니다.

지붕모양에 있어서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뉘는데 가장 일반적인 형태로 지붕과 지붕이 서로 책을 펼쳐서 엎어놓은 듯한 모양을 하는 맞배지붕 형태와 위에서 내려다 볼 때 여덟 팔 자 모양을 한다는 팔작지붕 형태가 있습니다.

광주향교의 경우 대성전과 동 · 서무, 명륜당과 동 · 서재는 맞배지붕 형태이며, 문회재와 양사재 건물은 팔작지붕 형태를 하고 있습니다.
향교가 교육의 기능을 상실한 후 초창기에는 당대 유명한 학자들이나 지방의 양반들이 경치가 좋은 도시 바깥쪽 변두리에 서원을 세워 과거 합격자를 교생으로 받아들여 교육과 제사를 드림으로써 본격적인 서원의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즉 최고의 엘리트 집단이 서원에서 공부하게 되었으며 엄격한 학칙과 학업분위기 등으로 인해 향교에서 미처 하지 못했던 참교육의 기능을 회복하게 됩니다.

아무리 좋은 제도라도 관리하는 사람들이 제대로 운영을 못하면 타락하는것이 당연하겠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서원도 별질되는데 ① 각 서원마다 각자의 학파나 문벌이 있음으로 인해 당파싸움(좋은 말로 하면 민주주의식 정당정치인 붕당정치)의 소굴이 되어 학업을 등한시 하거나 ② 서원의 양반 및 관리들이 백성을 착취하는 장소로 쓰거나 ③ 하는 일 없이 서원에 모여 할 일 없이 놀고 먹거나 ④ 너도나도 사액서원(나라에서 돈과 노비, 책등을 하사하는 서원)이 되어 나라의 경제를 궁핍하게 하는 등으로 인해 이런저런 폐단이 많아 조선말기 흥선대원군(이하응)이 어린 고종 임금을 대신하여 섭정하는 10년 동안 1000여개중 대표적인 47개소를 제외한 모든 서원을 강제로 없앴습니다.
향교와 서원은 교육을 시키는 학교의 기능과 선현에 대한 제사 그리고 지방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찾을 수 있지만 다음과 같은 사항에서 차이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향 교 서 원
국립 사립(사액서원의 경우는 나라에서 어느 정도 지원)
지방교화 기능으로 인해 도시 중심부에 위치 교육을 강조했으므로 조용하고 경치 좋은 도시외곽
중국 사람까지 제사를 드림 우리나라 사람만 제사를 드림
교수진은 과거 급제자나 중앙관리 유명한 학자나 양반
평민이나 양반 누구나 입학가능 양반의 자제만 입학가능
설립 시기는 고려시대부터 설립 시기는 조선중기 16세기(1500년대)부터
향교에 있어서 빼 놓을 수 없는 한 가지는 바로 제사입니다. 비록 조선 중기 이후 향교가 교육의 기능을 상실하여 서원에 그 역할을 넘겨주기는 했지만 향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기능의 하나인 제향의 역할은 21세기인 지금까지도 계승, 발전해 오고 있습니다.

석전이란 원래 산천(山川)이나 사당(祠堂), 그리고 학교에서 조상을 추모하기 위해 드리던 제사의식을 말합니다. 하지만 산천이나 사당에서 드리는 제사는 여러가지 형태가 있지만 학교에서 드리는 것은 석전하나뿐이었으므로 점차 학교의 제사의식만을 말하게 되었습니다.

석전대제는 매년 봄, 가을 음력 2월과 8월 상정일(上丁日. 초순 10갑자의 丁자가 들어가는 날)에 성균관을 위시한 전국 234개의 향교에서 일제히 경건하게 드리고 있습니다.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우리나라에서만 드리는 유교제사이므로 문화적 가치가 높아 중요무형문화제 제 85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그 밖에 음력 8월 27일 공부자탄강일(공자님 탄생일) 기념행사로 작헌례를 드리고 있으며 한 달에 두 번 분향례 라는 간단한 기념행사를 드리고 있습니다.